춘천 닭갈비, 전주 비빔밥, 신당동 떡볶이 등등. 이름만 대면 자동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지명과 먹거리처럼, 의심할 나위 없이 우리에게 ‘충무로 = 영화의 거리’로 인식되어 있다.
그렇다면 떡볶이를 먹기 위해 신당동을 찾듯, 영화를 보기 위해 혹은, 영화배우와 감독을 만나기 위해 충무로를 찾은 적이 있는가?
찾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있던 영화관들마저 그 자취를 감추고 대한극장만이 홀로 ‘영화의 거리’ 충무로를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충무로가 한국 영화를 대변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 영화계를 거론하면서 빼 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을까?
대한민국 영화의 현주소를 있게 한 '충무로'를 다시 돌아보는 시간.
#1.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950~1960년대 충무로
1950년대 - 한국의 헐리우드, ‘충무로’ 탄생 |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흥행 몰이로 충무로를 알리다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국도극장에서 개봉해 2달간 서울에서만 관객 18만 명을, 이듬해 수도극장에서 개봉한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이 11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 성공을 이뤘다. 이로써 이들 극장이 위치한 충무로가 일명 ‘대박’ 거리로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도 아니었다.
충무로, 영화인의 집합지 되다
그 여세를 몰아 명동과 종로의 문화적 분위기와 저렴한 임대료를 배경으로 한 충무로에 영화제작사들이 몰려들었다. 그 덕분에 스타다방, 청맥다방 등 ‘사무실 겸용’이던 충무로의 다방에는 캐스팅 기회를 고대하는 배우지망생, 제작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감독과 시나리오, 지방에서 온 흥행업자까지 넘쳐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연기학원 <한국배우전문학원>이 문을 열고, <한국영화제작자협회>등의 영화인 단체 사무실, 여관, 양장점과 미용실 등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충무로는 다양한 영화들이 제작될 수 있는 환경으로 재탄생 했다.
특히 지금의 남산골 한옥마을에 위치한 수도방위사령부자리에 부산에 있던 국방부 영화촬영대의 시설과 기자재가 옮겨와 촬영장, 현상실, 녹음실을 갖춘 <필동영화촬영소>가 문을 열면서 과거의 영세한 수준의 모습을 탈피하며 영화산업 활황의 싹을 틔웠다.
(좌) 영화제작자, 배우, 감독, 배우지망생 등 다양한 영화인들로 북적이던 충무로 다방거리 (출처:씨네21)
(중) <춘향전>에 함께 출연한 영화배우 전택이, 노경희(부부)가 스타다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 (출처:씨네21)
(우) 1955년 개봉하여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춘향전> 포스터 이미지 (출처:한국영상자료원)
1960년대 - 한국영화의 황금기, 충무로 |
충무로 영화, 국민을 사로잡다
TV가 귀했던 시절임은 물론, 변변한 여가문화 역시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영화는 국민 모두의 유일한 문화생활이었다. 당시 국민 1인당 평균 관람횟수가 연가 5회를 상회하며 영화산업은 대호황을 누렸었다. 영화 제작에서도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멜로드라마, 스릴러, 액션영화에서부터 코미디, 시대극, 공포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와 소재를 아우르며 관객들의 넋을 빼놓았다. 여기에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김수용 감독의 <유정> 등과 같은 ‘문예영화’ 걸작들의 배출로 대중적 공감을 이끌어 내는데 성공했다.
스타 여배우 탄생 하다
<유정>으로 데뷔한 남정임, <청춘극장>의 윤정희, <흑맥>의 문희는 제1세대 트로이카 여배우로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음은 물론, 당시 거의 모든 유명 감독들과 작업했다. 윤정희는 신선하고 단아한 이미지로, 문희는 청순가련형의 정석을, 남정임은 깜찍함의 대명사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최대 한국영화시장의 정점을 찍다
1963년 박정희 정권이 영화법을 바꾸기 전 충무로에 문을 연 영화사가 71개에 달했고, 이 시기에 제작된 영화 편수만 해도 1,500편이 넘었다. 총 관객 수면에서도 1969년 총관객수 1억7천3백만 명이라는 정점을 찍으며 ‘황금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영화시장의 가장 큰 규모를 가진 시기였다.
(출처 : 위클리경향)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한 김수용 감독의 <유정> 포스터 이미지. ▶
일본 홋카이도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최초의 한국영화이기도 하다.
(이미지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
지금까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950~60년대의 충무로를 돌아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충무로 다시보기 두번째 이야기, 1970~80년대 충무로 영화산업의
불황과 침체, 그리고 그 속에서 잔잔히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느껴보자.
(사)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홍보부 정득순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