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 한국영화산업의 쇠퇴 |
본격적인 TV시대 개막
1970년대 충무로는 불황의 내리막길이었다. TV 보급이 본격화되자 영화관객은 자연스레 브라운관으로 눈길을 돌려, 1억 7천 만 명을 불러모았던 1969년 충무로는 다시 오지 않을 시간이 되어버렸다. 문을 닫는 극장이 하나 둘씩 생겨났고, 1972년 한 해 제작된 영화 편 수는 1969년 절반에 밑도는 112편까지 줄어들었다.
한국영화, 매력 잃다
여기에 1960년대를 풍미했던 멜로드라마는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 댔고, 소재 고갈로 흥미 있는 스토리도 부족해져 작품의 질은 물론 흥행 면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불황의 한파와 검열이라는 재갈을 물린 영화계가 빈사상태에 빠지자 정부는 허겁지겁 한국영화제작을 늘리기 위해 한국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한편을 수입할 수 있는 ‘쿼터제’를 도입했지만, 오히려 외국 영화를 수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말이 전도되는 비극을 초래했다.
하이틴 영화 등장
정부의 갖가지 틀과 규제 속에서 숨 쉬기도 어려웠던 당시, 하이틴영화의 등장은 사람들의 숨통을 틔어 주었다.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잊지마’로 시작된 ‘진짜진짜… 시리즈’와 석래명 감독의 ‘고교얄개’와 같은 고교시리즈물로 일어난 변화의 바람은 침체된 한국영화의 돌파구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한국영상자료원)
1980년대 – 한국영화의 전환기 |
한국 영화, 어둡고 긴 터널에서 빠져 나오다
1979년 제 4공화국의 막이 내리고 1980년에는 제 5공화국에 출범함에 따라 한국영화 역시 커다란 전환기를 맞게 된다. 지난 70년대 정부의 ‘유신이념의 구현’이라는 특정 정책 명령이 사라지고 영화 검열에 있어서도 완화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충무로의 새로운 변화
한껏 자유로운 날개가 자란 한국영화는 생생한 소재를 선택하고 그 표현의 영역을 넓혀 감으로써 소생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검열 완화로 자유로운 창작 열정을 회복한 충무로에 대담한 에로티시즘, 사극영화, 종교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새롭게 대두된 것이다.
특히 멜로드라마는 70년대 전체 영화 제작 편수의 40%에 달했던 것에 비해 80년대에 들어와 15% 상승한 비율인 55%까지 이르며 기세를 회복하였다. 반면 활극과 희극 영화, 70년대 정책적인 장르였던 군사영화, 반공영화, 계몽영화 등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신인 감독의 충무로 입성
80년대 영화계는 신인 감독들에게 보다 많은 등장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배창호 감독의 <안녕하세요 하나님)>와 <꿈>,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등의 작품으로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확립하는 한편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도 정길수, 정지영 등 많은 신인 감독들이 주목 받기 시작하며 이후 90년대 한국영화의 또 다른 창조적 기여를 하였다.
(좌) 1987년 <씨받이>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원조 ‘월드 스타’ 강수연에 대한 기사. 이 외에도 많은 한국영화들이 해외영화제에서 수상성적을 내면서 대외적인 한국영화의 자리가 조정되기 시작했다. (출처: 동아일보)
(중)(우) 1980년대 <매춘>, <뽕>, <어우동>, <애마부인> 등 수많은(!) 에로티시즘 작품의 대두와 흥행은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의 완화를 대변한다. 이미지만으로도 발그레해지는 당시 애로티시즘 영화 포스터들 (출처:한국영상자료원)
‘충무로 다시보기’ 그 두 번째 이야기를 통해 1970년~80년대 침체기를 맞아 한껏 찌뿌렸던 충무로 영화의 표정을 읽어봤다. 제 2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다시 밝아질 1990년~2000년대 충무로의 표정을 기대하며, 다음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