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5 당선작 그 세 번째 리뷰는, ssita 님이 [내 생애 최고의 영화] 부문에 응모해주신

쿠로사와 키요시 감독의 공포영화 <회로> 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항상 공포영화를 삼시세끼 밥먹는 거 마냥 옆에다가 끼고 살지만, 공포영화라는 용어에는 미안하게도 진짜 무서워서 식은땀을 흘리고 밤에 자다가 오줌마려워서 눈을 빼꼼히 떳는데 전날 본 영화가 생각나 이불속에서 다리만 배배 꼬고 버티다가 다시 잠이 들길 바랄만큼 무서움을 느낀적은 거의 없다. 그런 영화를 꼽아본다면 악마적인 상상력으로 가득했던 엑소시스트와 호쾌하게 웃어제끼는 혀가 까만 귀신이 등장했던 여우령 정도일까?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잠깐 오싹오싹 한 것이 아니라 은은하게 무서우면서도 몇년이 지나도 가끔 그 장면이 생각나서 밤중에 빨래줄에 걸려있는 하얀빤스를 보고도 다리에 힘이 풀여 주저앉게 만들 정도로 여운을 남기는 영화가 내게는 별로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구로사와 키요시의 회로만큼은 아직도 그 여운에 발가락이 살살 떨릴 지경으로 내게 공포감을 선사한 진정한 공포영화다.


어느날 화원에서 일을 하는 미치의 주변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동료는 자살하고 사장은 실종되고 친구는 눈앞에서 사라지고 엄마마져 없어져버린다. 이는 모두 정체를 알 수 없는 빨간테이프가 둘러쳐진 방과 연관되어 일어난다. 한편 대학생인 가와시마는 처음으로 인터넷 접속을 하게되는데 다짜고짜 '유령을 만나고 싶습니까?'라는 메시지와 함께 검은봉지를 머리에 쓰고 흐느적 거리는 일련의 사람들이 컴퓨터 화면에 등장한다. 온통 벽에 '도와줘'라는 글씨로 도배를 해 놓은 어딘지 모를 공간의 유령같은 익명의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한다. 가와시마는 컴퓨터관련 학과의 학생인 하루에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그녀 또한 이 알 수 없는 사이트에 중독되어 자살을 한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

영화 회로가 공포를 축적해 가는 방법은 노골적이지 않고 은은하며 그것은 우리의 일상공간에 있을지도 모르는 혹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잘 알 수 없는 어둠에 대한 (고립감 내지는 고독감이라고 불러도 좋을) 공포를 표현한다. 구로사와 키요시가 그리는 일상의 공간 어딘가는 항상 초점이 흐려져 있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세계의 종말이 도래했음을 느끼기 시작하는 중반이전까지 감독이 관객에게 다른 세계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음을, 세계가 뭔가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알리기 위해 억지로 화면을 흐려놓고 있다. 심지어 실내에서 화면을 흐려놓기 위해 곳곳에 비닐을 쳐놓아서 비닐을 통해서 인물들을 훔쳐보거나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을 마이크를 크게 해놓고 녹음했을 때 자연적으로 녹음이 되는 '고오오오오~'하는 화이트 노이즈와 함께 보여준다. 마치 은은한 소음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공단 바로 옆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이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겨준다. 이렇게 인물을 배경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연출방식은 등장인물을 철저히 소외시켜 그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고독한 존재임을 상기시키고 보는 이의 불안감을 효과적으로 증폭시킨다
.

처음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소년은 땅에 발이 닿는 위치에서 죽어있었다. 보통 사람이 자살을 하려면 의자를 놓고 올라가 의자를 밀어버리고 발이 닿지 않아 순간 살고 싶어도 죽게 된다. 그러나 이 소년은 살려고 하면 살 수도 있는 그런 방법으로 자살을 한다. 이건 자살이 아닌 무언가 다른 존재에 의해 죽임을 당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자살을 하거나 사라져버린 사람들은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서도 동일한 자리에 하나의 검은 자국처럼 남게된다. 마치 살아있는 육체의 반영인 그림자처럼 말이다.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누군가에게 연결되어 있고 싶어하는 외로움은 그러므로 죽어서도 동일한 공간에서 외로움이라는 감성을 끌어안은체 절망적으로 남겨져버린다. 현재에도 사후세계에도 인간의 행복에 대한 어떠한 구원도 존재하지 않는 회로는 그래서 남은자의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끝나지 않는 망자의 절망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학원생이 연구하는 인간환경의 시뮬레이션이라고 하는 컴퓨터의 하얀점들은 멀어지면 다시 가까워지고, 너무 가까워지면 합쳐지면 소멸된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고독감은 적당한 거리에서 유지되어야 한다. 타인에게 너무 다가서면 감정의 상처를 받게 되고 이는 다른 의미로 소통의 죽음을 의미한다. 회로에서 그려지는 고독감에 대한 공포야말로 절망적인데, 누구도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친구끼리도 소통하지 못하고, 부모 자식도 소통을 못한다. 그리고 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인터넷으로도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다. 이는 앞서 얘기한 망자의 절망감으로 다시 이어진다
.

회로에서 구로사와 키요시가 유령을 보여주는 방식은 영화의 분위기 만큼이나 모호하고 흐릿하여 더욱 공포감을 자아낸다. 사후 세계에 존재하는 유령들이 포화되어 현실세계로 넘어올 때 어떤 것이든 좋을 물건을 통해서 넘어온다. 빨간테이프가 쳐진 방에서 나올수도 있고, 책을 통해 도서관에 등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사후세계의 혼령들이 포화되어 현실세계로 넘어온다는 일련의 시스템-회로-이 구축되고 이것의 중심이 인간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강력한 도구인 인터넷이기에 전세계의 누구나 똑같이 사후 세계에 감염되어 인류가 없어진다는 거대한 블록버스터급의 묵시록으로 발전한다. 여기서 빨간테이프가 쳐진 방을 통해 등장하는 귀신의 모습은 주인공들을 보여주는 방식과 정반대로 연출된다. 앞서 얘기했듯 회로는 등장인물들을 소외시키기 위해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주변을 아웃포커스 했다면 유령들은 주변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정작 그 존재는 흐릿하게 보여준다. 산자와 망자를 정확히 반대로 표현하여 이곳과 다른 세계가 있음을 이리도 멋지게 보여주는 영화가 있었는가 싶다. 또한 유령들이 말을 할 때는 '고오오오오~'하는 음향마저 없이 또렷하게 들리기 때문에 그 소름끼치는 충격은 배가 된다
.

언제나 봐도 등골이 오싹한 장면은 가와시마가 눈앞에 있는 유령의 존재를 부인하며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단지 환영이야. 그러니 내가 달려가서 잡으려고 하면 넌 그냥 사라져버릴거야'라고 소리치며 두려움을 무릅쓰고 귀신을 향해 달려가 그의 어깨를 잡는데, 순간 모든 소리가 정지하고 가와시마가 유령의 어깨를 정말로 잡는다. 그때 처음으로 귀신의 존재(어깨)는 또렷하게 보여지고 이는 흰점이 가까워졌을 때 서로 소멸한다는 시뮬레이션처럼 산자와 망자가 만났을 때, 즉 두 세계가 접함점을 이룰 때 산자는 소멸해 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가와시마는 죽음을 맞게 된다
.

언제나 공포의 중심에 인간을 놓는 구로사와 키요시의 영화인 회로는 몇명 안되는 등장인물로 전세계가 멸망해 가는 과정을 은은하고 세련된 연출로 진짜 공포를 보여주며 차가운 잿빛이 감도는 도시의 풍경과 소름끼치는 귀신의 존재, 인터넷으로 은유되는 과학기술에 대한 공포가 어우러진 정말 멋진 영화이자 그의 작품 중 큐어와 함께 단연 최고작이다.


이상 입안이 바싹 말라오며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려다 에어컨 바람에 도로 들어가는;
ssita 님<회로> 리뷰였습니다~!



칩순의 '내맘대로' 덧붙임_'내 생애 최고의 영화'로 공포영화를 꼽는다는 것이 처음에는 조금 의아하게 여겨졌습니다. 왜, 보통 내 생애 최고의 영화라고 하면 감동적이거나 교훈적인 영화를 먼저 떠올리게 되잖아요? (공교육의 폐해인가;;) 그런 의미에서 ssita님이 작성해주신 <회로> 리뷰는 영화 선정 기준 자체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말초적인 자극에만 주력한 공포영화가 아닌, 인간의 심리를 서서히 잠식하는 공포영화라는 점에서 이 작품이 '내 생애 최고 영화'로 꼽힌 것에 수긍할 수 있었어요. 공포의 중심에 인간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그것을 솜씨좋게 잘 그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영화는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야아~)


* 칩순의 별 쓰잘데기 없는 추가 코멘트 *

칩순은 최근 프랑스 공포영화 <마터스 : 천국을 보는 눈>을 보고 정말이지 진짜 천국에 갈 뻔 했습니다;;;으허헝
어찌나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무섭던지, 평소 하드고어 영화에 라면을 곁들이는 강심장 + 강철비위의 소유자인 칩순도 새벽까지 잠 못이루다 곤히 주무시는 어머니의 어깨를 쉐이킹하며 "엄마, 나 청심환!!" 이런 굴욕의 대사를 내뱉고야 말았다죠. 쩝. 그 어느 공포영화도 나에게 진정한 의미의 공포를 선사하진 못했다!고 자부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의미에서 조심스럽게 <마터스 : 천국을 보는 눈>을 추천해드려요. d^^b

....자다가 오줌싸도 난 몰라 오호호호~*


<마터스>의 크레이지 할망구. 얼굴만 봐도 살떨려 ;ㅁ;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