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영화의 미래
<아바타>, <드래곤 길들이기>와 같은 3D 영화가 관객을 끌고 있는 요즘 왜 다시 고전영화로 눈을 돌려야 하냐는 질문을 듣곤 한다. ‘고전’이 현재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분명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허다한 평론가나 감독이 ‘고전영화’에 대해 논하고, 질문하고, 추억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이 무한한 선이라면 우리가 위치한 ‘바로 지금’의 지점은 보일락 말락 한 미세한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점을 아무리 쪼개고 분석해도 찾지 못하는 해답이 있으니, 그것은 아마 ‘미래’일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길, 세상 모든 것들의 미래는 현명한 분석가에 의해 제시되곤 하지만 그것은 추측일 뿐이고, 그 추측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과거의 역사’이다.

얼마 전 ‘시네코드 선재’에서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1972)가 개봉했고, 이어 <대부2>를 개봉할 예정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상영했던 이 영화를 본 것은 1990년대였다. 어둠 속 짙게 깔린 무표정의 대부(Godfather) 돈 코르네오네(말론 브란도 분)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의 ‘스탠리’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고, 이미 노역이 된 말론 브란도라는 배우가 한 영화를 통해 어떻게 부활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떠올리면 이상하리만치 함께 기억되는 영화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세르지오 레오네의 유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다. 12년의 차이를 두고 만들어진 두 영화가 동시에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2009년 10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세르지오 레오네 특별전이 있었고, 나는 낯익은 음악으로만 기억하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 관람객의 연령은 다양했고, 누가 이렇게 오래된 영화를 보러 오겠냐며 우려하던 바와 달리 표는 매진됐다. 영화가 끝난 후, 한 영화평론가는 이 영화가 ‘자신의 추억’이자 ‘젊음을 위한 헌사’라고 수식했고, 관람객 중 대다수는 몇 해마다 습관적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본다고 고백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그들만큼 감동을 느낄 수 없었고 여전히 마지막 장면의 의미를 해독할 수 없었기에 언젠가 다시 보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부>는 어떤가. 우선 처음에는 내가 받은 감동과 그 영화에 대한 해석이 일치하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오래오래 ‘물음표’로 남았던 영화다.

나는 오래된 영화에서 평론가나 그 영화를 추억할 나이가 된 사람처럼 감동할 수 없었지만, 그들의 감동을 질투했고 기어코 몇 번이나 반복해서 그 영화들을 탐닉했다.

기억 저편의 단상: <대부>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꼭 그런 것만은 아닐 텐데, 흥행하는 영화마다 ‘조폭’이 등장했고 나는 그 영화들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당시 극장에 가는 것을 꺼렸다. 그럼에도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를 볼 기회가 생겼고, 언제부턴가 이런 갱 영화의 머릿돌은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까까머리에 교복을 입고 함께 웃고 즐겼던 친구들이 결국 “내가 니 시다바리가!”라는 말을 내뱉고, 종국에는 서로를 속고 속이는 냉혹한 길로 몰락할 때(<친구>), 죽어가는 언니를 위해 결혼을 결심한 조폭 두목의 로맨틱한(?) 면모를 보여 두려운 존재를 ‘우스꽝스럽지만 친근하게’ 보일 때(<조폭마누라>), 깡패 같은 선생과 엘리트 깡패가 충돌할 때(<신라의 달밤>), 가방 끈 긴 사위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된 조폭 가문을 볼 때(<가문의 영광>), “너는 내 편 맞지?” 하고 몇 번이나 확인해도 믿을 수 없을 때, 속지 않기 위해 속여야 할 때(<비열한 거리>), 우리는 극장을 나서며 그 세계의 일부를 경험한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영화는 우리를 경험하지 않은 세계로 초대하며, 그것이 희화화되거나 과장될 때 더 큰 매력을 발산한다. 하지만 문장 사이사이의 욕설, 그리고 액션과 폭력이 의리의 방패마냥 과도하게 등장할 때, 그들만의 세상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감독의 의도인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이탈리아계 마피아 패밀리의 삶을 그린 <대부>는 이탈리언이지만 이민자의 자손으로 어느 정도 미국의 세계관을 갖고 있던 코폴라의 작품이다. 대부 돈 코르네오네는 딸의 결혼 파티에서 축하객을 만나며 밀담을 나눈다. 오래 전부터 그를 만나기를 고대한 사람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린다. 딸의 결혼식에는 어떤 부탁도 거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식이라는 가족의 거사를 치르는 동안 돈 코르네오네는 패밀리의 일(?)을 거행한다. 이처럼 <대부>는 마피아의 일과 단란한 가족의 일상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1940년대 미국의 단면을 안에서 바라본다.


_코니의 결혼식에 함께 모인 대부 가족.

반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하 <원스 어폰>>는 밖에서 안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대부>와 구별된다. 전자가 이미 형성된 돈 코르네오네 패밀리의 속살을 여실히 드러낸다면 후자는 누들스(로버트 드니로 분)와 맥스(제임스 우즈 분)를 중심으로 유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우정과 배신을 통해 쓸쓸한 결말을 제시한다. 즉, 아버지 돈 코르네오네의 복수를 위해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총을 빼든 마이클(알파치노 분)과 어린 시절 함께 한 도미니크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누들스(로버트 드니로 분)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들의 안과 겉을 훑는 기분을 경험할 수 있다.

_데보라와 그녀를 모습을 훔쳐보는 누들스, 

_파티장의 모습을 훔쳐보는 누들스와 캐롤.

I'm gonna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_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다고 말하는 대부의 표정.

<대부>를 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이 대사만큼은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단 한 줄의 대사에 매혹되어 <대부>를 몇 번이나 본 기억이 있다. 그 후 38년이라는 거대한 시간이 흐르고, <대부>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대부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은 머리에 총을 겨누는 최후의 수단이다. 양자인 조니가 원하는 배역을 맡지 못하자 말의 머리를 잘라 새하얀 침대를 핏빛으로 만드는 깜찍한(?) 협박만으로 우리는 그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얼마나 잔혹한 것인지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유의 비호감적인 일들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대부의 입장에서 그런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권력을 지닌 강자가 상대를 무릎 꿇게 하는 대부의 모습이 ‘비열함’보다는 ‘의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로 대가를 지불할 테니 딸의 복수를 부탁하는 장의사에게 우정으로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책한다. ‘당신이 나의 친구라면 당신의 적은 나의 적’이라는 대부의 논리는 ‘당신이 나의 적이라면 끝끝내 복수할 것’이라는 암묵적 이론을 잘도 감추고, 우리를 대부의 패밀리로 초대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결국 대부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은 대부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간다. 대부에게 친구가 많은 만큼 그 친구의 적들도 많을 것이고, 반대로 생각하면 대부 자신이 말한 대로 친구의 적이 곧 대부의 적이 된다. 그렇다 보니 갱들의 세계에서 ‘의리’가 강조되는 만큼 ‘배신’이 빈번히 등장하는 것이다. 대부는 돈, 매춘, 도박 등 각종 어둠의 세계는 인정하지만 ‘마약’만큼은 인정할 수 없음을 강조했고, 이에 반감을 품은 타 조직은 대부를 저격한다.

창세기에서 신이 에덴동산의 모든 열매를 허락하나 선악과만은 먹을 수 없다고 한 것이 문제의 출발이었듯, <대부>에서 어떤 불법(심지어 살인까지)도 허락하지만 ‘마약’만큼은 안 된다고 말한 것이 돈 코르네오네 일가의 위기를 가져온다. 그 위기는 돈 코르네오네가 원치 않았던 일, 정상적인 괴도(?)를 향해 나아가기를 바랐던 막내아들 마이클이 자신의 뒤를 잇는 결과를 낳는다.

I slipped. 나 미끄러졌어.

_도미니크가 쓰러지는 모습과 누들스가 살인을 한 후 떨어뜨린 칼.

대공황과 금주령의 시대를 살아낸 인생을 그린 <원스 어폰>은 미국사회의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시간의 교차점이 복잡하게 얽혀 유년과 청장년의 시절을 모두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부>보다 한층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몰려든 노동자들은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현실을 육체로 경험하고, 강자에 의해 쓰일 수밖에 없는 역사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력은 뒷골목의 치열한 다툼과 경쟁에서 출발한다. 10대 소년 누들스와 맥스, 짝눈, 팻시, 도미니크는 누들스의 아이디어로 갱단의 밀수품을 안전하게 운반하고 큰돈을 모으지만 원래 그 일을 맡아하던 버그의 분노를 산다. 첫 수확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버그의 총에 맞아 쓰러진 도미니크. 생애 처음으로 큰돈을 벌게 되었다며 가장 기뻐하고 날뛰던 자그마한 아이 도미니크가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쓰러진다. 모자가 튕겨나가고 마지막으로 그의 오른발이 튕겼다가 다시 바닥에 닿는 순간까지, 마치 시간이 늘여지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진행된다. 분노와 슬픔에 가득 찬 누들스가 달려가 안아보지만 도미니크는 이미 죽음의 경계에 이르렀다. 그때 이 영화의 최고의 대사 “누들스, 나 미끄러졌어. I slipped"를 들을 수 있다. 극한 상황에서 오히려 일상적인 말로 슬픔을 극대화하는 힘, 그것은 <원스 어폰>만의 매력이다. 이전에 버그 일당에게 호되게 당한 후 복수를 결심한 맥스가 아니라 누들스가 칼을 집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분노의 칼은 버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이를 말리기 위해 달려온 경찰마저 해친다.

마이클과 누들스의 뒤바뀐 인생의 첫걸음은 어김없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는 인생의 이면을 닮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패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성환(류승완 분)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던 성빈이 살인을 하게 되어 7년간 소년원과 감옥을 전전하다 결국 사회부적응자로 낙인찍혀 주먹의 세계에 가담하게 된 것은 결코 영화에만 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똥파리>에서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 분)이 여고생 연희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이 하는 일을 반성하려는 찰나, 그의 뒤통수를 내리찍는 것은 다름 아닌 연희의 오빠인 것처럼 어둠의 세계는 방심하는 순간 파멸을 불러온다. 그것은 해피엔딩을 바라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만큼이나 강한 이끌림이다. <대부>와 <원스 어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운명에 발목이 잡힌 인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내부의 손이 언제, 어떻게 배신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복수’는 정의의 응징이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누이의 남편마저 살해할 수 있고(<대부>), 친구들을 모두 죽이고 첫사랑마저 빼앗아간 상대가 목숨을 걸 만큼 탄탄한 우정을 쌓아온 오랜 친구일 수도 있다. 이때 가할 수 있는 복수는 오히려 복수하지 않음으로써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다(<원스 어폰>). 이처럼 해피엔딩과 거리가 먼 필름 누아르가 우리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달콤함보다 냉혹함에 가까운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고, 웬만해서는 경험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생각보다 우리와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추억의 힘
“오히려 그때가 좋았어” 하고 말하는 부모 세대의 ‘그때’란, 1960, 70년대 혹은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가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었던 시절의 감수성을 말한다. <대부>는 70년대를, <원스 어폰>은 80년대를 견뎌낸 사람들의 추억상자이다. 그 추억을 고이 간직한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 속에 그들만의 <대부>와 <원스 어폰>을 풀어놓는다. 하여 우리가 접하는 필름 누아르 혹은 조폭영화들은 조금씩 다르게 <대부>와 <원스 어폰>의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또 그 시대를 향유한 어떤 관객은 <대부>가 개봉했다는 이유만으로 30년 만에 극장관람을 시도했고, 함께 온 사람에게 10분 후에 벌어질 일을 스포일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비록 바로 옆자리여서 영화에 집중하는 데 거슬렸지만 오랜만에 열어본 추억상자에 흠뻑 취한 그 아저씨를 보고 있자니, 그 마음이 약간이나마 헤아려졌다. 얼마나 반가웠을까. 작년 <원스 어폰>을 보러 가서도 그랬었다. 다섯 소년이 휘파람을 불며 거대한 건물 사이를 의기양양 걸어갈 때, 도미니크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한 남자는 서둘러 눈물을 훔쳤고, 누들스의 첫사랑 데보라의 어린 시절이 등장할 때마다 누들스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환성을 지르기도 했다.

우리가 현재진행형의 영화만큼이나 오래된 영화에 관심이 높은 것은, 세월의 풍파와 함께 낡고 녹슬고 심지어 먼지가 쌓이기까지 한 옛날의 감성이 영화를 보면서 새롭게 재생하기 때문이다. 그 영화를 봤던 때가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재생된 감성의 진폭은 커질 것이다. 그 시간만큼 우리의 내면에서 숙성됐을 테니까. by pEP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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