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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9 허지웅 기자가 본 CHIFFS 상영작, <아마도 악마가> <남색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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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악마가>


올해 충무로국제영화제 프로그램 가운데 <아마도 악마가>만큼 확연히 극장 밖 풍경을 환기시키는 영화는 드물 것이다. 로베르 브레송의 <아마도 악마가>는 감독의 필모그래피 위에서도 드물게 염세적인 작품이다. 정작 프랑스에선 자살을 유도한다며 개봉이 금지되기도 했다. 감독은 흡사 세상의 풍경에 의견을 제시하고 부조리를 지적하는 모든 종류의 의지 혹은 가능성을 부정하려는 듯 보인다. 거기 악마는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보이면 명쾌할 것이다. 커튼 뒤에서 세상을 조종하는 존재들이 거기 있다면, 그것이 악마든 사람이든, 최소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라도 또렷할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아서 더욱 불길하다. 알 수 없어서 더욱 처연하다.

영화의 주인공 샤를은 똑똑한 젊은이다. 세상사에 의견을 갖고 토론하기를 즐긴다. 세상이 잘못돼 있다고 확신한다. 예전에는 그것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지금은 이 부정한 세상의 그 어떤 모습도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인가? 누가 부조리를 조장하고 있는가? 도무지 알 수 없어 괴롭고 또 괴롭다. 무력감에 휩싸인 샤를이 생각할 수 있는, 온전한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결론이란 하나뿐이다. 목숨을 끊는 것이다. 그러나 샤를은 자살이라는 행위에 근본적으로 전제된 종교적 원죄의식을 감당할 생각이 없다. 그는 자신을 살해해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영화의 마지막 샤를은 자신을 살해해줄 사람의 앞에 선다. 샤를은 입을 열고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말이 채 끝나기 전 총알이 발사된다. 고꾸라진 샤를의 주머니가 청부업자에 의해 털리고, 화면은 순식간에 암흑으로 전환된다. 감상에 젖을 여유 따위는 허락되지 않는다. <아마도 악마가>는 68혁명 이후 비관과 무력, 자조에 침식된 청년사회의 패배주의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다. 결기로 주장했던 화두들은 절충됐고 신뢰했던 사람들은 변심했으며 텅 빈 광장은 단어 몇 가지로 무참히 매도됐다. 이 땅위에도 촛불이 근 백 일 동안 지속됐다. 이제 와 광장은 거의 비워졌다. 누군가의 울부짖음은 올림픽의 함성으로 지워졌다. 기륭전자 앞, 어느 단식 농성자의 생명이 꺼져가는 지금 이 시간마저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비관과 회의로 희석됐다. 대통령 한 명에게 이 책임을 온전히 전가할 수 있다면 차라리 속 편할 것이다. 되풀이되는 부조리는 대체 누구의 잘못인가? 누가 조종하는 것인가? 아마도 악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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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대문 >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날들이 있었다. 물도 삼킬 수 없고 숨도 크게 들이마실 수 없는 순간이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지나보니 별 것 아니고 살다 보니 치기 어린 것이라는 세상의 말은 거짓말이다. 삶과 죽음과 사랑과 미움의 무게감이란 세상 모든 이에게 개별적으로 동등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무게감이 동등하지 않다고 믿는 자들에 의해, 어린 시절의 사랑 이야기는 종종 타자화 되곤 한다. 그간 적지 않은 수의 청춘영화가 그저 예쁘거나 속수무책으로 자폐적인 ‘어린 애’들의 풍경을 제 멋대로 연민하며 배설해왔다. 보태거나 덜어내는 것 없이 진정성을 가장하지 않는 청춘영화의 존재감이란 그래서 더욱 각별하다. 더 없이 소중하다. <남색대문>이 꼭 그렇다.

열일곱 살 고교생 몽크루와 린은 단짝이다. 린은 동급생 장시호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 가져다 버린 신발이든 물병이든, 장시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주워 모을 정도다. 그런 린을 바라보는 몽크루는 마음이 좋지 않다. 보다 못한 몽크루가 린과 장시호 사이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나서보지만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심지어 장시호가 몽크루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문제는 몽크루 역시 그런 장시호가 마냥 싫지 않다는 것. 몽크루는 장시호에게 비밀 하나를 털어놓는다.

<남색대문>은 대단히 섬세한 영화다. 정교한 대사와 연기의 합으로 짜인 섬세함이 아니다. 인물들의 표정과 작은 손짓이, 문장으로 정리될 수 없는 체온과 공기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입 안에서 오물대며 돌아다니다 채 정착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단어들의 기운이, 그 흐트러짐 만으로도 충분히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더불어 누구에게나 존재했던 기억들을 끄집어낸다. 굳이 말을 뱉어내지 않아도 하고 싶은 이야기, 고민을 온전히 전달해내는 것이다. 가장 큰 공은 역시 배우들에게 있다. 기술적으로 훌륭한 연기와 그 자체로 영화의 근간을 규정해가는 연기란 다른 것이다. 어색함은 어색한 대로, 솔직함은 솔직한 대로 숨김없이 드러내며 영화의 척추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그 빤한 바보스러움 마저 아끼고 살피게 만든다.

아참, 가장 중요한 말을 빼먹었다. 이 영화를 보고도 계륜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면, 당신은 진정한 용자다. 남자든 여자든, 아무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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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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