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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27 [고전의 재발견] No.03 이별할 때 이들처럼(01) 10

좋은 이별이란

오디세우스가 원정을 떠난 후 유혹자들을 물리치며 하염없이 직물을 짰던 페넬로페, 백조가 된 오라버니들을 되찾기 위해 가시덤불을 엮어 스웨터를 뜨던 동화 속 공주, 조국을 떠난 고단한 삶을 퀼트 속에 직조해 넣었던 영화 <아메리칸 퀼트>의 이민자 여성들, 신분이 다른 남성과 사랑하고 이별한 후 정신병원 복도에서 하염없이 '레이스를 뜨는 여자' 뽐므까지, 내 친구 명이는 그 여성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고 있었던 셈이다. 아, 7월 7일을 기다리며 1년 내내 베를 짜는 직녀도 가까이 있었다.
소중한 대상을 잃었을 때, 그로부터 거두어온 열정은 일시적으로 다른 대상(대체 대상뿐 아니라 중간 대상, 연결 대상이라는 용어도 사용된다)에게 투자된다.
                                                                                                       -김형경 《좋은 이별》 132p

소설가 김형경의 애도 심리 에세이 《좋은 이별》은 차마 이별을 준비하지 못해 상처 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언젠가 카페에서 이 책을 읽으며 하염없이 내리는 창가의 빗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무릎을 치며, 맞아! 그래서 우리가 이별하고 아파했구나 하고 생각했던 날들. 이별에 관한 무수한 책들을 읽으며 한때 가장 소중한 사람이 지금은 연락도 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아파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좋은 이별이란 어떤 걸까. 김형경은 이별을 받아들이고 적절한 애도로 상한 마음을 치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을 오래 되새김질 했다. 그맘때 내게 다시 찾아왔던 영화, 페넬로페가 짰던 직물의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고 맞물려서 이별의 풍경을 펼쳐줬던 오래된 영화들이 있다.

이별이 아름다운 이유

_<As time goes by>를 들으며 릭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일자

연인의 이별에서 우리는 때때로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를 구분할 수 없는 당혹스러운 풍경을 목격한다. 그들의 이별이 만남만큼이나 운명적이어서 둘 중 누구도 이별의 가해자라고 할 수 없는, 그래서 결국 둘 다 이별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한다. 개인의 자유가 우선시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옛날 옛적에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의 세상은 속으로 삭혀야만 하는 숙명적 이별 풍경을 만들어낸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함께 떠나기로 한 연인이 기차역에 나타나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만은 믿어달라는 일자의 편지, 그리고 홀로 남겨진 닉. <카사블랑카(1942)>에서의 이별은 그렇게 시작된다. 사랑의 끝이 결코 이별일 수 없듯, 사랑이 시작되는 것처럼 이별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영화 <카사블랑카>. 담배 연기 짙은 바에서 흘러나오는 슬프고 아름다운 음악 선율 ‘As time goes by(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시의 사랑은 위태롭지만 더욱 절실하다. 그렇기에 일자의 갑작스런 변심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그것이 결코 닉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안심했다.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순간에 이별을 맞게 되는데, 나는 그때마다 서로의 마음이 변했기 때문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나 자신을 가장 아프게 하기 위해. 그 고통으로 이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사실은 나 자신이 만들어낸 생각이 가장 나를 아프게 한다는 사실을, 살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_이별의 이유에 대해 다그치는 릭 앞에서 눈물 흘리는 일자. 남겨진 자만큼 떠나는 자 또한 슬프다.

고전영화에서 만나는 이별 풍경은 그런 나의 생각을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생각했던,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얄팍하고 속 좁았던 이별의 이유보다, 고전영화에는 잘 다듬어진 ‘납득이 가는 이유’가 즐비했다. 일자가 닉을 떠난 이유, 다시 돌아온 일자를 다른 남자 품으로 떠나보낸 닉의 선택. 개인의 소소한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비춰진 2차 세계대전과 평화라는 대의 때문에 닉은 일자와 또 다시 헤어졌다. 하지만 이번 이별의 고통은 이전의 그것보다 상쇄된 것이다. 헤어짐의 이유조차 모른 채 이별을 통보받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상실감보다 ‘이별의 이유’에 더욱 집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적절한 작별 인사도 있었고, 무엇보다 닉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사랑하는 연인을 태우고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릭. 그의 뒷모습은 담담했지만 이별을 맞이하는 슬픔을 숨기고 있었다. 위험한 시국 앞에 자신의 사랑을 희생시킬 줄 아는,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낼 줄 아는 남자의 뒷모습은 멋있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As time goes by), 또 한 번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생겼다. 그때 내게는 그를 측은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이 새롭게 생겼다. 과연 대의를 위해 개인의 소망을 버리는 게 적절한 일일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그래서인지 일자를 다른 남자의 품에 보내야 하는 그의 슬픈 미소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_남겨진 자의 뒷모습.

<카사블랑카>, 여전히 흑백 영화는 요즘의 그것처럼 화려하거나 기교가 뛰어나지 않다. 하지만 치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정제하여 보여주는 흑백 영화만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최첨단 장비를 자랑하고 인간의 눈으로 포착할 수 없는 색깔을 표현할 수 있을지라도 흑백 영화를 만들 것이다(‘미카일 하네케’의 <하얀 리본>처럼). 살아가면서 한번쯤 이 영화를 다시 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하겠지.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운 것은 여전히 아름답다.’

      누군가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오직 당신을 위해 나쁜 일을 저지른다면 용서할 수 있나요?
                                                                       -<카사블랑카> 가운데 일자가 릭에게


생애 단 한번뿐인 하루라도 그를 사랑했다면…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다가가면서 대사관의 대연회장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리고 오드리 헵번이 연기한 앤 공주가 “지금까지 방문하신 도시 가운데 어디가 가장 마음에 드셨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겉치레 하나 없이 “로마입니다. 살아 있는 한 이곳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할 거예요.” 하고 대답했을 때, 객석에서 커다란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나왔다. 지금까지 영화를 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놀라 어리둥절해 하면서 나 역시 박수의 도가니에 가담하기 위해 손뼉을 짝짝 쳐댔다.
바로 앞으로 눈길을 돌리니, 할머니도 힘차게 박수치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는 빈 옆자리로 고개를 돌리고는 생긋, 풍요로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참 좋은 영화죠?”라고 말을 건네는 듯이. 스크린에서 반사되는 빛을 받아 어둠 속에 보얗게 떠오른 할머니의 옆얼굴에 소녀의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
가네시로 가즈키 《영화처럼》, <사랑의 샘> 420~421p

일본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은 하나의 영화에 뿌리를 두고 이야기들이 가지를 치는, 옴니버스 형식의 소설이다. 다섯 개의 단편이 있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인물들은 서로 <로마의 휴일>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영화처럼》은 가물가물한 기억 속 영화 <로마의 휴일>을 떠오르게 했고, 다시 본 <로마의 휴일(1953)>은 이 영화를 보던 때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엄마, 저 남자는 공주를 좋아하는데, 왜 모른 척해?” 그때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가 이뤄지는 게 이 세상이라고 믿었던 순진한 어린아이였다. 엄마는 대답 대신 내 작은 손을 꼭 잡았다. 그때 엄마의 눈동자에서 순간 반짝였던 눈물을 본 나는 더 이상 어떤 질문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어렸다 하더라도 울고 있는 사람에게 쉽게 말을 걸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내 자그마한 손과 엄마의 눈물, 이렇듯 오래된 영화는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시절로 우리를 초대한다. 어릴 적 엄마와 함께 본 <로마의 휴일>과 지금 본 <로마의 휴일>은 분명 같은 영화지만, 그 여운은 후자의 것에 더 머물렀다. 녹록치 않은 삶을 견뎌내느라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보지 않는 엄마에게도 한때 애잔한 추억이 있었으리라.
어릴 적 나는 ‘사랑한다’는 말이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뜻이라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나 둘 이별할 때 그 황당한 일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한참을 울었다. 사랑하는데 왜 헤어져?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나는 울었다. 어린 나는 앤 공주와 조 브래들리가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니까. 사랑하더라도 절대 함께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사회의 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니까.


_평범한 일상을 즐기는 앤 공주와 브래들리

로마에서 앤 공주가 조 브래들리와 함께 한 시간은 단 하루뿐이다. 우리에게 지겨울 만큼 평범해서 벗어나고 싶은, 그 하루의 일상-시장을 돌아다니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파티에 가서 파트너와 춤을 추는 일-이 앤 공주에게는 평생에 단 한번뿐인 사건이었다.
다시 공주의 자리로 돌아간 그녀가 로마에서의 기자 회견에서 브래들리와 재회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그 둘은 그저 눈빛으로 대화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살아 있는 한 당신을 잊지 못할 거예요.’

<로마의 휴일>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장하거나 치명적이 않다. 그들은 이 짧은 생이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사랑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루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는 데 만족한다. 지금의 나는 세상 모든 사랑하는 -연인에 국한되지 않은- 사람들이 평생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음에 담고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이유가 앤 공주와 브래들리처럼 특별한 상황이든, 어느 한 쪽이 유명을 달리한 경우든, 다른 한쪽이 마음이 변한 것이든,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영원할 수 있다.

*나머지 이야기:《영화처럼》에 등장하는 <로마의 휴일>

어느 여름 날, 혼자 구민회관으로 <로마의 휴일>을 보러 간 용일은 영화를 다 본 후, 지금의 거지발싸개 같은 생활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함께 영화를 본 수많은 아이들의 눈이 어둠 속에서 스크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태양은 가득히 80~81p

처음 보지만 <로마의 휴일>은 정말 좋은 영화였다. 이따금 옆자리로 슬쩍 고개를 돌리면, 즐거워하는 이시오카의 옆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스크린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장내에 박수갈채가 일었다. 나도 박수를 쳤다. 이시오카 역시, 나와 같은 심정으로 박수를 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끝난 후, 우리는 20분 정도 걸어서 국도변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가 조금 늦은 저녁을 먹었다.
“오드리 헵번은 보통 사람들보다 아마 한 7센티미터는 팔이 길 거야.”
이시오카는 오므라이스를 먹으면서 흥겹게 조잘거렸다.
“그레고리 펙이 입은 양복, 어깨에 뽕 들어 있는 거 아닐까.”
프랭키와 자니 159p

6시 정각,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아줌마가 유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 영화, 아줌마가 정말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랑 같이 봤던 영화야.”
유가 아줌마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장내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유를 보고 웃고 있는 아줌마의 얼굴이 천천히 어둠에 묻혔다. …… <로마의 휴일>은 유와 아줌마를 완전히 매료했다. 유와 아줌마는 웃었고, 그리고 아줌마는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 주위를 개의치 않고 엉엉 소리 내어 오열하는 아줌마의 옆얼굴을 슬쩍슬쩍 훔쳐보면서 유는 조금은 부끄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크나큰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그 감정은 유의 내면에 난생 처음 싹튼 것이었다.
페일 라이더 252~253p


그들은 <로마의 휴일>을 보면서 함께 봤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고, 그 영화를 보던 때의 자신을 발견했고, 새로운 결심을 했다. 그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은 세월의 모진 풍파에 휩싸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그때의 행복한 기억은 영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감동하여 눈물 흘렸을 것이다. 나는 가네시로 가즈키가 왜 소설에 <로마의 휴일>을 공통분모로 썼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누구와 함께 봤고, 또 생의 어느 시점에 봤는지에 따라 어떤 영화는 평생 기억해야 할 추억이 되기도 한다. 각각의 등장인물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단 한편의 영화가 앤 공주의 단 하루뿐인 추억과 닮았다.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없는 대로……
발칙한 상상이 지구 한 바퀴를 돌고 겨우 한 숨 돌릴 즈음, 이런 이야기가 탄생하지 않을까. <아내가 결혼했다(2008)>. 그렇다. 결혼한 여자가 또 결혼을 하는, 게다가 남편에게 이 사실을 설득시키는 여자, 그 역을 맡은 배우가 손예진이기 때문에 면죄부를 가질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보통의 사람에게 이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냐 하는 것이다. 하지만 50년 전에 이보다 더 발칙한 사랑 이야기가 존재했다. 까트린을 둘러싼 쥘과 짐의 미묘한 사랑을 그린 <쥘 앤 짐(1961)>이 그것이다. 이 영화는 앙리 피에르 로셰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했는데, 작가가 노년이 되어서야 집필을 완성했기에 격정적인 이야기라 하더라도 담담한 문체로 쓰였다. 프랑소와 트뤼포 감독 또한 작가의 의도를 영상으로 옮겼고, 영화 또한 차분하고 담담하게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의 이야기를 표현했다. 까트린이 이 남자에게서 저 남자에게로 사랑이 옮겨갈 때, 쥘과 짐은 질투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신처럼 까트린을 떠받들었다.

_짐과 이야기 나누는 까트린.

순정과 자상함으로 까트린만을 기다려온 쥘은 그녀와 결혼한다. 하지만 그녀가 떠나갈까 봐 두려움에 떤다. 그들과 오랜 우정을 공유한 짐의 등장으로 셋의 기묘한 관계가 시작되고, 쥘은 까트린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오히려 둘의 관계를 축복할 지경이다. 어느 날 까트린이 쥘과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털어놓자 짐은 이해한다고 대답한다. 이때 돌아온 까트린의 말-누가 날 이해하는 건 원치 않아요. 그녀는 당당했고, 그 당당함이 그녀를 자유롭게 했고, 타인에게 어떠한 이해도 바라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게 했다.

_남장을 한 까트린, 그리고 쥘과 짐. 젊은 시절 함께였던 세 사람.

<쥘 앤 짐>은 오래 전부터 한 번은 꼭 봐야지 하고 벼르던 영화였다.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사랑. 그게 오히려 당연한 듯 받아들여진다는 누군가의 의견이 사실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자주 언급되는 영화는 이상할 만큼 오랫동안 보기가 꺼려진다. 그 영화를 보기도 전에 타인의 의견이 이미 개입되기 때문이다. <쥘 앤 짐>을 보는 데 무려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10분 단위로 끊어서 보다가 한참 동안 마지막 30분을 잊고 지냈던 것이다. 그 이유가 지겨워서도, 혹은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다만, 타인의 입을 자주 탄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랄까. 되도록 그것을 배제하고 보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해서 까트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그녀를 숭배하는 쥘과 짐의 모습을 보면서 시간이 흐른 후에 이 영화가 내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생각해보았다. 지금은, 타인의 의견들로 가득 차 있으니, 까트린의 말처럼 이해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겠다. 다만 짐과 까트린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쥘은 평생을 까트린이 떠날까 봐 노심초사했던 사람이 맞는지 싶을 정도로 담담했다. 아마 그는 까트린과 함께 하는 내내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싶다. 준비된 이별은 오히려 안식을 안겨준다.


_남겨진 자(쥘)의 뒷모습 그리고 FiN(The End). 이별에서 가장 마지막에 남는 자는, 떠나는 자가 아니라 남겨진 자.

당신을 보면 이따금 전쟁 전에 보았던 중국 연극이 생각나. 막이 오르면 황제가 관객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고백하지. “여러분은 지금 가장 불행한 인간을 보고 있소. 왕비가 둘이기 때문이요. 첫 번째 왕비, 두 번째 왕비.”
<쥘 앤 짐> 가운데 짐이 까트린에게

by pEPe+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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