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8일.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는 소리 띠, 따, 뚜,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 529-2, 여기는 부천 판타스틱 스튜디오, 2010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 2회차 트레일러 촬영 현장입니다. 장재진 감독(한국예술원 기획제작실장), 영화 <친구>에서 동수의 아버지 역으로 강한 인상을 안긴 전영운 씨, 도회적인 이미지와는 상반된 감수성을 보여준 오선화 씨 그리고 학생 및 교직원 등 한국예술원 인력으로 구성된 스태프들까지,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초가을의 축제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충무로국제‘영화제’? ‘충무로’국제영화제!

기존의 영화제의 트레일러와 차별되는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만의 트레일러를 제작하고자 합니다. CG와 애니메이션 없이 감성을 자극하는 트레일러를 지향하고 있어요.

트레일러의 콘셉트는 충무로 영화제의 ‘발견, 복원, 창조’에 기인합니다. “충무로를 통한 과거와 현재의 아련한 만남”으로 요약할 수 있겠네요. 할아버지는 충무로에서 일했던, 충무로에 몸담았던, 충무로에 추억이 있는 사람이고요. 그녀는 자신의 페르소나이자 사랑했던, 미안했던, 복합적 감정을 갖고 있는 대상입니다. 판타지를 통해 옛 충무로 거리에서 그녀를 찾게 되고 포스터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가 참여했던 영화, 스크린에서 그녀와 재회합니다.  그 둘 사이엔 수십 년의 미증유(未曾有)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지요. ‘잘 지냈어? 난 괜찮아…’ 그녀가 있는 곳이 바로 2010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인 것이죠. 그녀의 얼굴 옆으로 <2010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가 뜨면서 트레일러가 종료됩니다.

다른 영화제 트레일러와는 다르게 CG를 전혀 쓰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재현의 완벽 불가능성은 있게 마련이고 충무로 영화제 트레일러에는 추상적인 애니메이션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귀엽고 예쁘기보다 조금 느리지만 진지한, 아날로그적인 묵직한 느낌을 담고자 했고… 충무로 영화제 트레일러라면 기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영화제가 아닌 충무로라는 곳의 오랜 역사, 정통성과 깊이를 화면에 이입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죠.

할아버지는 영화를 오랜 시간 찍은 사람이기를 바랐습니다. 전영운 선생님이 적역이셨지요. 그녀의 경우, 오디션이라는 과정이 불편했고, 트레일러라면 신선한 느낌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과거의 상처, 아픔이 있는데 가려진 느낌의 여자. 많은 후보들이 있었지만 거의 예쁘고 매니지먼트된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오선화 씨의 경우, 이면의 상처가 있는 듯 한 인상이 그녀 역에 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함축’이지요. 현실의 시간을 한정된 시간으로 옮길 수밖에 없지요. 영화 제작은 시간을 갖고 작업한다는 것에 재미가 있습니다. 장편보다 단편이 훨씬 자유로울 수 있어요. 장편은 인물들 각각의 서사가 갖춰져야 하고 기-승-전-결로 흘러가야 한다면, 단편은 기만 있어도 좋고 승만 있어도 좋고 전만 있어도 좋고 결만 있어도 좋지요. 짧고 임팩트가 강하고, 하나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표현할 수 있어요. 장편에 비해 상상의 창의가 자유롭다는 게 단편의 매력입니다.

장재진 감독은 올해 초 제42회 끌레르몽페랑영화제(프)를 비롯한 5군데의 영화제에 단편영화 <상봉>을 출품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의 단편영화가 놓인 영화계 지형도가 달랐음을 지적하면서 단편영화의 존립 혹은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견해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내년 봄에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공포물로 장편 영화를 작업할 계획이라고 하니 조만간 만날 그의 장편 영화 서술이 기대됩니다.


 
그녀, 베일을 벗다

눈 밝은 분이시라면 한 결혼정보회사의 지면 광고에서 성인이 된 굴렁쇠 소년의 상대여배우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광고에서의 도회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오선화 씨는 희곡의 줄거리를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이기도 했습니다. 현장에서는 화상을 입어 살갗이 희게 일어난 스태프를 걱정하기도 하는 다감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문외한으로서는 한 신을 찍기 위해 몇 시간을 기다리는 일도, 거듭되는 촬영에서 일정한 정서를 반복하는 일도 전혀 녹록치 않아 보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일반 관객으로도 영화제에 참여할 기회가 없었어요. 촬영이 겹친다거나 해서 많이 아쉬웠죠. 트레일러는 영화제의 첫인상이 될 수 있잖아요? 감회가 새로워요.

언젠가 다른 인터뷰에서 연극무대보다는 드라마나 카메라에 어울리는 마스크라고 답했던 적이 있어요. 연극이 덜 매력적이란 뜻은 아니었고, 소리울림이라든지 무대예술에서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이 카메라의 시선을 통한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최근에 <마지막20분을 말하다> 희곡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어요. 두 남녀가 이끌어 가는 연극이에요. 연인인데, 서로 비대칭적인 기억을 갖고 있어서. 그게 갈등이 되는 것이죠. 사연집이라는 영매의 집을 통해서, 관계를 알리면 모든 기억이 상실되는 설정에서 결정적인 기억을 갖고 있는 남자가 자기의 연인이었던 여자에게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연기한다고 할 때 극을 이끌긴 어려울 것 같단 생각도 들었지만 읽기만 하면서도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제 이야기와도 접점이 있었던 것 같아서 더 감동적이었던 것 같아요. 아련한 추억과 절절한 가슴, 관객도 함께 눈물로 치닫는 연극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꼭 하고 싶어요.

계속 긴팔 카디건을 입고 있어요.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 야외 촬영에서는 슛 들어가기 전 대기하는 중에 살이 익어버리더라고요. 지난 회차 촬영에서 어깨가 익어서 아직도 빨갛죠. 스태프들은 장비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타기도 하니까요. 그래도 트레일러가 잘 나온다면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충무로? 내가 산증인이지

전영운 선생님은 트레일러 촬영 전 서강대학교 대학원 졸업 작품을 촬영하다 다리 부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슛과 슛 사이, 오선화 씨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걱정 섞인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어떤 책과 자료보다도 풍부한 충무로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혹간 눈물을 비치기도 하셨던 전영운 선생님은 글로는 미처 다 전할 수 없는 충무로에서의 시간을 전달했습니다. 2001년 영화 <친구>를 통해 예명이었던 전민에서 본명인 전영운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에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후 시인에서 영화배우로서의 삶까지, <카사블랑카> 개봉의 추억에서 150여 편에 이르는 영화학도들과의 작업까지, 트레일러 속 배역은 어쩌면 배우 전영운에 대한 오마주는 아닐까란 심증이 들었습니다.

트레일러에서는 감독 시절 연정을 품었던 여배우를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는 역할이야. 충무로는 역사 ‧ 숨결 ‧ 영화가 함께 흐르는 이름이지. 그래서 충무로국제영화제가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영화제로 제대로 서길 바라. 네임밸류를 찾을 수 있는 힘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해. 난 충무로의 산증인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충무로국제영화제의 슬로건은 “내 충무로 찾기”야. 남은 건물이 없어지기 전에. 충무로 골목골목, 건물 건물마다 다 이야기가 있고 추억이 있어. 대원호텔이 없어진 게 아쉽고, 청맥다방 건물은 아직 있지만 예전에 청맥다방은 영화인들의 아지트이자 공용사무실이기도 했지. 지방 흥행자, 감독들 하며…… 마담이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이었어, 컴퓨터야 컴퓨터. 자리에 없는 사람을 찾아온 손님까지 정확하게 챙겼다고. 청맥다방 위층은 청맥녹음실이라고 이만희 감독의 본부였지. <만추>처럼 후에 재평가를 받았던 주옥같은 작품들이 탄생한 곳이지.

극장들 얘기도 빼놓을 수 없어. 대한극장이 최고의 극장이었거든? 70mm를 상영할 수 있는 유일한 극장이었어, 35mm의 두 배라고, 생각을 해봐 사운드도 다르고 필름을 거는 레일이 전혀 다르다고. <벤허>를 볼 때의 감동은 정말 대단했지. 설립자가 전라도 담양 출신의 국회의원이었어. 원래 설계를 미국 영화사가 했는데 동료 국회의원들이 의자를 하나씩 기증했다고. 시설이 정말 당시 최고 수준이었지. 또 화신백화점 안엔 화신극장이, 신세계 백화점 안엔 동아극장이 있었어. 니혼다제, 2본 상영이라고 해서 액션영화에 멜로영화를 끼워서 상영하는 식이었는데 두 편 관람가격이 한편 가격보다 쌌어.

강단에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의 작품에 참여를 하면서 직접 보여주고 있어. 선배로서 제대로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으니까. “네가 네 거울을 직접 봐라”, 가슴이 뛰지 않으면서 덮어놓고 현장에 나오지 말고 내가 누구인지 정리가 되면 그때 영화를 만들어야지. 영화인들의 의무는 커뮤니케이션 문제에 대해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거야. 영화인은 영화인답게, 노동자는 노동자답게.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치인 100명보다 영화인 1명의 힘이 더 강할 수가 있으니까. 작은 주제라도 자꾸 이야기해서 변
화를 이끄는 게 영화의 힘이야.



트레일러는 영화제가 스스로에 대해 내리는 정의와도 같습니다. 네살박이의 자기 확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그 부모가 한 세계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이라면 경우가 다를 수도 있겠지요. 충무로와 충무로국제영화제에 대한 영화인들의 경험과 고민을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이자, 동시에 당신의 시선을 사로잡아 발길을 이쪽으로 확 잡아끌 2분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롤롤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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