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포문을 여는 첫 번째 리뷰는, 켄켄님이 [가장 감동적인 영화] 부문에 응모해주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작 <아무도 모른다> 입니다.
오랜만의 영화리뷰-
<아 무 도 모 른 다 , 2004>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야기라 유야, 키타우라 아유, 키무라 히에이, 시미즈 모모코, 칸 하나에, 유
칸 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받은 일본 아역배우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그리고 한참 지난 2009년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걸어도 걸어도>라는 작품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특별한 '사건'없이, 이는 즉 '임펙트'없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영화라는 평이였다.
그러던 중 '아무도 모른다'라는 이 작품이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걸어도 걸어도>를 보다가 중도 포기해버린;; 나는 또 한번의 호기심에 5년이나 지나버린 캐캐묵은,
설마 걸어도걸어도와 비슷한 분위기일까.. 시간이 지난 영화니 설마 더 심할까;; 라는 생각이었지만
영화매니아인 엄마의 추천을 받아, 보게 되었다.
이 영화.. 지독하다.
눈물이 나지도, 감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독하게 마음이 아프다.
"엄마, 이번엔 여기 얼마나 살아?"
영화의 시작은 조금 엉뚱했다. 그래서 나는, 전개를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들로 인한 소음으로 일어날 이웃들의 불평을 막기위해, 아들 한명을 제외한 네 자매 중 두명은 트렁크 속에,
한명은 후발대로 출발시켜 감쪽같이 속이려 한 엄마가 있다.
외동 아들인척 이웃집에 인사하는 장남은 이미 거짓말이 익숙한 얼굴이고,
트렁크 속에서 꺼내지는 아이들의 표정은 해맑다.
아이들을 집에 가두어놓고, 술집을 전전하며 남자를 바꾸어가는 엄마의 행실만을 보고도
우리는 지레 짐작할 수 있다. 이 집에 흐르는 피는, 여러갈래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학교? 학교 안나와도 잘된 사람들 수두룩해 ! 엄마는 행복해질 수도 없는거니?"
분명 이 집의 '엄마'는 조금 다르다.
현실의 '엄마'들에게는 "나쁜년!" 소리를 들어도 할말이 없다.
현실의 엄마들에게 아이들이란, 자신이 평생을 다해 보호해주어야 할 존재이며, 목숨과도 같은 존재이지만,
이 네자매의 엄마는 반대이다. 오히려 아이들에게 위로를 받고, 친구에게 상담하듯 어린 아들에게
새로운 남자친구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는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미 예상했어야 했다.
그녀가 원하는 용서받지 못할 자유를, 해방을.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도 모르게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아무리 돈이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생활을 지탱하는 가족이 있어야하고
물론 그것이 자라나는 시기라면, 당연히 부모의 지지가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이 아이들의 엄마는, 그것을 모른다.
자신이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이,
아이들 역시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고 있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해방을 위해
엄마는 집을 나가고, 아이들에겐 돈만이 남겨진다.
인간에게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이라는 것이 있듯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엄마가 있을때도 그러했듯이 가족들을 책임졌던 장남은,
아빠'들'을 찾아가 돈을 구하기도 하고 돈을 아끼며 꼼꼼히 가계부를 쓴다.
그렇게 얼마간,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아이들 뿐인 생활의 불안감은 아이의 두꺼운 파카속에 꽁꽁 숨겨진다.
엄마가 없는 아이들의 생활은, 자유가 펼쳐지기도 전에 점점 시들어간다.
시들고 시들어, 땅 속으로 점점 떨어져 내린다.
위태위태 했다.
편의점에서 잔뜩 봐온 장바구니가 아이에게 버거워보이듯, 아이들 뿐인 집안은 위태로웠다.
아이들에게는 먹을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학교, 친구, 안정된 보금자리.
아이들은 친구에 급급해하고, 정에 목말라하며, 사랑에 굶주려 한다.
부모가 처음 그것을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 주위에는 은근히 여러명의 어른들이 지나쳐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대부분 이들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고있다.
그러나 그들의 관심은 각박하게도 짧다.
아이들에게는 그것으로 인해 더 깊고 깊은, 상처가 생긴다.
결국 '모르는'것 보다 더 큰 상처가 되는 '앎'인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이것이 실제 있었던 일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리는 글에서부터이다.
나의 주위에도 이런 비극적인 일이 있었다. 그 집 역시 많은 아이들이 있고,
젊은 부모는 아이들을 방치하며, 집은 쓰레기통이 되어 간다고 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아이들은 점점 늘어만 간다. 이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현실이다.
그렇기에 '슬프다'기보다는 착잡하고, 지독하다.
언제나 그렇듯 팩션(faction)들은 마음에 알 수 없는 응어리를 남긴채 크래딧을 올린다.
마무리에서 영화는 시작과 같은 평화로운 분위기로 그 지독함을 매꾸려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리 없다, 끔찍한 죽음이 있었고, 사무치는 아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넓은 길, 아이들이 걸어가는 길에는 아이들만이 있을뿐 누구도 함께하지 않는다.
그러나 묻고 싶다. 정말, 아무도 몰랐던 것인지.
누군가는 분명 알았던 것이 아니였는지. 알면서도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닌지.
그렇기에 모순 된,
'誰も知らない'
아무도 모른다 였다.
출처 : http://blog.naver.com/thdms2091/60086969223
이상, 공감가는 구절과 다시봐도 마음이 아픈 영화의 장면들이 수두룩했던
켄켄님의 <아무도 모른다> 리뷰였습니다~*
* 칩순의 '내맘대로' 덧붙임
<아무도 모른다>는 [가장 감동적인 영화]로 꼽기에는 너무 아프고 시린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칩순 역시 영화를 두세번 보고난 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가슴이 패일듯한 그 아픔이 또 다른 방식의 감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영화 속에서 심드렁하리만큼 담담하게 비추는 아이들의 고된 일상이, 그들을 그렇게 방치한 사회에 대한 막연한 분노를 뛰어넘어 가슴 뭉클한 무언가를 느끼게 만들었거든요. <아무도 모른다>. 이 간단명료한 말만큼 영화의 내용을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잘 담아낼 수 있는 제목이 또 있을까요? 정말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니, 모르기를 바랐던 일일 겁니다. 알고싶지조차 않았을 거예요. 죄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은 누구로부터 보상받아야 할까요?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걸까요?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던 야기라 유야의 '희망따윈없는' 눈빛이 가슴을 걸레쥐어짜듯 아리게 만들었던 영화. 실화에 바탕을 두고있음을 밝히는 영화의 도입부를 머릿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네요.
딴 소리지만..(잠시 원래 모드로 돌아와서;;)
이 영화로 2004년 칸 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야기라 유야는,
요로코롬 훈남으로 성장했네요 +ㅛ+
역시 훈남은 떡잎부터 다르다능!
<아무도 모른다>의 바통은
[연애하고 싶은영화] 부문의 당선작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가 이어 받습니다.
카밍 쑨~